실존주의의 핵심 명제: 사르트르의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심층 분석
1. 서론
철학사에서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의 선언,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Existence precedes essence)”만큼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고 열띤 논쟁을 일으킨 문구는 드뭅니다. 이 짧으면서도 근본적인 진술은 무신론적 실존주의의 주춧돌을 이루며, 인간에게 미리 설정된 본성, 영혼, 또는 목적(본질)이 존재한다고 보았던 수천 년의 서양 철학적 전통에 정면으로 도전합니다. 플라톤 이래로 수많은 철학자들은 개별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이미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규정하는 고정된 개념, 즉 영원한 청사진의 관점에서 인류를 이해해왔습니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이 근본적인 전제를 뒤집었습니다. 두 번의 세계 대전 이후 보편적인 의미가 붕괴되는 시기에 글을 쓴 그는, 인간은 먼저 단순히 존재한다고 제안합니다. 즉, 인간은 이 세상에 실재하며, 출현하고,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 순수하고 원초적인 실존 이후에야 개인이 자신의 선택, 행동, 그리고 헌신을 통해 스스로를 규정하게 됩니다. 신성한 설계자도, 타고난 운명도 없습니다. 이러한 근본적인 전환은 정의를 규정하는 책임을 전적으로 개인에게 부여하며, 이는 단순히 철학적 개념을 넘어 절대적인 책임과 자유를 향한 강력하고 때로는 두려운 요구가 됩니다. 본 분석은 이 명제의 심오한 함의를 탐구하며, 이 명제가 인간의 조건을 어떻게 재정의하고, 자유를 필연적으로 만들며, 무의미한 세계 속에서 진정한 참여(앙가주망)를 요구하는지 깊이 있게 다룰 것입니다.
2. 본문
전통적 형이상학의 전복: 종이칼에서 인간에게로
사르트르 명제의 중대성을 완전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것이 전복시키는 전통적인 관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신을 창조주로 상정하거나 보편적인 형식(플라톤적 본질)을 믿는 데 기반을 둔 전통 형이상학은, 어떤 대상이 실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에 앞서 본질—정의, 개념, 필요한 속성들의 집합—이 존재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종이칼의 예시: 사르트르는 고전적인 종이칼의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장인이 칼을 만들기 전에, 그는 이미 개념(본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그것의 목적(종이를 자르는 것)과 필수적인 속성(모양, 재료)입니다. 본질이 우선이며, 실존은 그것을 따라오는 결과입니다. 이것이 본질주의적 세계관의 모델입니다.
하지만 사르트르는 인간의 경우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합니다. 우리를 미리 구상하고 만든 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청사진을 따라 만들어진 산물이 아닙니다. 그는 단순히 이 세계에 '내던져진' 존재이며, 처음에는 아무것도 규정되지 않은 미정의 상태입니다. “인간은 스스로가 만드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개인의 인간 주체는 처음에 어떠한 선천적 속성이나 목적, 본성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실존 (세상에 존재함)이 출발점입니다. 우리가 이후에 선택하는 행위들—우리가 하기로 결정하는 일, 사랑하기로 선택하는 대상, 지지하기로 선택하는 대의—을 통해 비로소 개별적으로, 그리고 집단적으로 우리의 본질 (우리의 정의)을 구축하게 됩니다. 이 급진적인 자유는 곧장 실존주의의 핵심 감정인 고뇌(앙가주망)로 이어집니다.
이처럼 인간을 미리 정의된 틀에서 해방시켰다는 점에서, 사르트르의 명제는 20세기 후반 인문학 전반에 걸쳐 포스트모더니즘과 구조주의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지적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이는 단순히 철학적 사유의 영역을 넘어, 개인의 삶의 방식과 가치관을 재정립하게 하는 강력한 윤리적 기반을 제공했습니다.
자유와 고뇌: 절대적 책임의 불가피한 부담
사르트르의 명제는 즉각적이고 중대한 윤리적 결과를 낳습니다.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면, 이는 개인이 절대적으로 자유로우며, 그 결과 절대적인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개성에 대해서만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선택함으로써 전 인류를 위해 선택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가 한 가지 선택(예를 들어 의사가 되는 것, 정치 활동가가 되는 것)을 할 때, 우리는 그 순간에 인간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보편적인 가치를 정립하는 것입니다. 사르트르는 “나 자신을 선택함으로써, 나는 인간을 선택한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보편적 책임감의 확장된 감각이 실존적 고뇌(*l'angoisse*)의 원천입니다. 고뇌는 단순히 두려움이 아닙니다. 그것은 외적인 안내자(신, 고정된 가치, 예정된 본성)가 부재할 때, 모든 도덕적 입법의 무게가 오롯이 개인의 어깨 위에 놓여 있다는 깨달음입니다. 우리가 취하는 모든 행동은 가치를 창조하는 행위이며, 이상적인 인간 본질을 정의하는 행위입니다. 궁극적인 자유와 그에 수반되는 보편적 책임에 대한 이 깨달음이 진정한 삶을 심리적으로 매우 벅차게 만드는 요인입니다. 나아가, 사르트르에게 고뇌는 회피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실존주의적 윤리의 출발점이 됩니다. 이 고뇌를 수용할 때에만 우리는 자유와 책임을 인정하고, 진정으로 도덕적인 행동—즉, 자기 기만을 벗어난 행동—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자기 기만(*Mauvaise Foi*): 자유를 회피하려는 시도
절대적인 자유와 책임의 막대한 부담을 고려할 때, 사르트르는 많은 사람이 그로부터 도피하려 한다는 것을 인식했습니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진실을 회피하려는 이러한 시도를 그는 자기 기만(*mauvaise foi*, 나쁜 신념)이라고 명명합니다. 자기 기만은 자신의 본질이 이미 고정된 사물(즉자)인 것처럼 행동함으로써, 역동적이고 스스로를 창조하는 의식(대자)이 아닌 척하며 자신의 자유를 부인하는 행위입니다.
예를 들어, 자신의 직무를 과도하게 기계적이고 자동적으로 수행하는 웨이터는, 마치 미리 프로그램된 기계처럼 행동하며, 스스로를 *오직* "그 웨이터"로 정의하려고 합니다. 그는 일을 그만두거나, 이의를 제기하거나, 단순히 제약 없는 의식으로 존재할 자유를 부정합니다. 마찬가지로, "나는 원래 수학에 재능이 없다"고 주장하는 학생은 '본질'(재능 부족)을 사용하여 '실존'(노력이나 헌신의 부족)을 변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기만은 모순 속에서 사는 전략입니다. 자신이 자유롭다는 것을 알면서도, 결정된 존재인 것처럼 행동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진정한 삶은 우리가 가치와 본질의 유일한 창조자임을 직시하고, 고뇌를 받아들이며, 스스로 선택한 프로젝트에 완전히 헌신하는 것을 요구합니다. 자기 기만은 실존주의 철학에서 가장 비윤리적인 태도로 간주되는데, 이는 인간 존재의 가장 근본적인 진실인 '자유'를 거짓으로 덮어버리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르트르에게 윤리적 삶은 곧 자기 기만을 끝없이 폭로하고 거부하는 투쟁을 의미합니다.
3. 결론
사르트르의 근본 명제,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단순한 철학적 원칙을 넘어선, 실존적 명령입니다. 이는 신성한 목적과 예정된 본성이라는 안락함을 걷어내고, 스스로를 정의하는 경이롭고도 압도적인 힘을 개인의 손에 쥐여 줍니다. 이는 우리에게 급진적인 자유를 인정하고, 수반되는 보편적 책임의 고뇌에 맞서며, 자기 기만의 유혹에 저항할 것을 요구합니다. 전통적인 제도와 신념이 더 이상 의미를 제공하지 못하는 세속화된 시대에, 이 사르트르적 개념은 여전히 깊은 관련성을 가집니다. 이는 개인이 끊임없이 진행 중이며, 영원히 미완성인 프로젝트임을 단언하며, 의미는 발견을 통해서가 아니라 끊임없는, 헌신적인 창조를 통해 찾아진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자신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용기 있고 진정성 있게 우리가 되고자 하는 자아를 창조하는 것입니다. 사르트르의 이 명제는 시대를 초월하여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물음에 답하고, 우리 각자에게 자신의 삶의 의미를 능동적으로 개척할 것을 촉구하는 영원한 외침으로 남을 것입니다.